나와 당신의 공존을 위한 포스트-회화적 제안

장은의의 <원> 연작을 중심으로

(다시)읽기로서의 보기

2017년 이후 장은의 작가는 그릇에 놓인 과일, 열매를 재현하는 회화를 만들고 있다. 샴페인 잔, 와인 잔, 접시, 보울, 워머 등등의 그릇과 포도알, 사과, 가든 토마토, 살구 등등의 과일-열매가 주된 오브제로 등장한다. 화면은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면서 피사체를 클로즈업해 찍은 사진 구성을 따른다. 이것은 회화이지만 명도 채도 밀도 구조와 같이 흔히 회화적 화면 구성에서 거론되는 주요 개념들은 거의 실현되지 않는다. 마치 ‘덜(less)’ 만들기가 전략인 듯 평이하고 단순한 정물화이며, 복잡한 트릭이나 암시적 장치가 없는 구도이고, 그릇에 담긴 과일-열매라는 시각적 패턴의 무한한 나열이고, 선택된 그릇과 과일의 관계로부터 유추할 알레고리적 의도도 강렬한 서정도 모호한 정동도 없는 회화이다. 밋밋하고 담백하다. 관객을 사로잡는 구성이나 단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부재하기에 그저 무심한 보기로 충분한 이런 구성은, 그러나 캡션(제목) 덕분에/때문에 회화의 일환이 아니라 회화‘에 대한’ 메타적 인용으로 바뀐다. 가령 ‘두 개의 원(살구와 접시)’이나 ‘열여섯 개의 원(열다섯 개의 포도와 접시)’와 같은 제목은 시각적 이미지와 언어적 읽기 ‘사이’(의 존재)를 개방 하게 된다. 우선 즉물적인, 재현적인 이미지를 보는 관습은 괄호 안의 제목에 의해 유지된다.

살구와 접시, 포도와 접시를 그렸다. 그러나 작가는 포도나 살구와 접시, 즉 과일과 그릇의 유적(generic) 차이를 표식 하되(mark), 접시 안에 담긴 포도 알 15개 하나하나를 세도록 요구하는 이상한 읽기를 제목에 집어넣음으로써 예의 관습적인 정물 보기를 슬쩍 건너뛴다. 괄호 안의 제목은 문화적 기호들, 지시적 기능을 담당한 기표들로 이루어지지만, 그 기호들은 작가의 이상한 호명 방식에 의해 ‘주관적’ 프레임으로 건너가 있다.

다음으로 이런 괄호 속 제목(의 생경함)보다 더 앞을 차지하는, 보편성(혹은 동일성?)을 표식 한 제목인 ‘두 개의 원’이나 ‘열여섯 개의 원’과 같은 제목은 첫 번째 보기/읽기의 문화적 일반성을 슬쩍 밀쳐내면서 환원적인, 관념적인, 형식적인 (재)구성의 단계로 이동한다. 재현적 예술은 대체로 일상적 지각 방식이나 문화적 반응 방식을 따르면서 선택적 클로즈업이나 ‘기계적’ 모방을 통해 현실과 예술의 연속성이나 차이를 도모한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은 회화로서 읽히는 것을 현실로서 보이는 것으로 환원하면서 지시적, 기호적 반응을 보충/보완한다. 장은의는 그런 제목의 기능에 괄호를 쳤다.

작가는 재현적 회화의 관습에 괄호를 침으로써, 그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지시적 회화를 다른 차원으로 전치시킨다.

추상적 관념 혹은 형이상학적 이념으로서의 원은 각 사물들, 이미지들의 구체성이나 일상성을 그것들의 원본, 최종심급으로 되돌림으로써 가시적인 것들의 차이나 다양성을 극복하려 한다. 살구나 접시 혹은 포도와 같은 차이는 원이라는 동일성에 의해 사상된다. 동일성에 저항하는, 차이를 음미하는 예외적인 장으로서의 회화라는 관습은 두 개의 원, 열여섯 개의 원과 같은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보기에 의해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구체와 특수를 이상하게 표식 하는 괄호 안의 제목과 일반과 보편을 표식 하는 일반 제목, 흔히 상호 배제적인 관습을 공존하게 만든 제목의 낯섬 때문에, 예의 구상과 추상의 대립을 (재)가시화하는 이상한 병치로 인해 이 단순하고 밋밋하고 담백한 그림은 모호하고 불안하고 기이한 떨림을 함축하게 된다. 긴장이나 불안, 그러므로 힘이 미약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또 타원에 가까운 포도 알도 원으로 환원되기에 이 역시 작가의 주관적 읽기/보기를 경유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사회적, 집단적 기호에 근거한 읽기나 안정화 관습을 거의 알아채지 못하게 슬쩍 움직이고 있다- 어떤 것도 제 자리에 잘 있지 못한다. 그릇-문화(심지어 워머는 이곳 한국인들에게는 아직 낯선 유럽의 그릇이다)와 열매-자연의 익숙한 대조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은 듯하고, 수학적 관념이나 영원한 이데아로서의 원은 엉성한 원들, 비뚤어진 원들,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원들 때문에 ‘시적’ 다의성으로 전치되어 있고, 열다섯 개의 포도알과 하나의 접시가 ‘열여섯 개의 원’으로 평등화, 동일시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장은의 작가가 제안하는 차이와 동일성의 도식은 주관적이고 개성적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정물의 구도가 비일상적이듯이, 워머에 놓인 사과는 일견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제목과 화면의 병치(포섭이나 보충이 아니기에) 역시 그렇다. 당신은 이렇게 쉽고 밋밋한 회화를 천천히 찬찬히 뜯어보아야 한다. 이것은 대놓고 내기를 제안하는 퍼즐이나 게임은 아니다. 이렇듯 비일상적인 비관습적인 배치나 읽기에 대한 것인 이 회화를 우리는 포스트-회화나 메타-회화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장은의의 회화는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여 감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 동일성과 차이, 관습과 질문-성찰 사이를 거처로 삼은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단순하고 자명한 그림, 밋밋하게 그려져서 깊이나 물성, 제스처로서의 회화를 간단히 물리치고 있는 이 덜 그려진 그림은 감상, 관조, 집중, 예외적 경험으로서의 회화에 대한 관습적 태도에 슬그머니 괄호를 치고 있기(나는 거부라는 말을 삼가고 있다. 그녀의 그림이 그렇게 가시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회화를 의심하고 있지 않아서이다)에, 회화의 관습 혹은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그 모든 전제를 가시화하면서 우리에게 회화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 같다.

그릇에 놓인 과일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이미지는 일상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일종의 사건으로 (재)경험하게 만드는 예술-회화의 특수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동시에 그 특수성에 괄호를 치는 작가의 독특한 스타일 때문에 온전히 회화로서 감상되지는 못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 오브제들에서 형태학적 동일성을 추출하는, 그런 집중과 동일시를 위해 일상적 맥락을 제거한 이 정물, 이 회화, 이 편평한 그림 속 덜 그려진 오브제, 덜 그려진 원은 그렇기에 오브제의 객관성이나 기호성, 관념의 완전성도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오롯이 예술가의 주관성,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일종의 ‘시적’ 환기성을 획득하게 된다. 예술은 미완성으로서, 시적 다의성으로서 일상과 과학, 철학 사이 어딘가에 자신의 자리를 보유한다. 동시에 작가의 회화는 회화의 반복이 아닌 회화에 대한 인용으로서, 주관적 자의식을 경유한 비평으로서 그 일회성을 보유한다.

더 그리고 더 채우고 더 만드는 전략, 완전성과 완성, 구도에 바쳐진 회화는 사실 지금으로서는 과거의 문화, 지배 문화이다. 수없이 덧칠한 바탕에 단단하게 올려진 오브제(사실 대부분의 오브제는 작가의 자아의 투사라는 것에 유념한다면)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회화를 희미하게 탈-색 시킴으로써, 대문자 회화를 지움으로써 작가는 예술의 죽음 이후의 예술이라는 어정쩡한, 겨우 살아있는, 포스트적 존재들의 상태를 가시화한다. “하여튼 페인팅이지만 가벼운 드로잉적인 느낌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작가의 언급은 선명하고 확실한 경계, 드로잉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곧 ‘그 예술’이었던 회화를 지우는, 그럼으로써 예술을 덜 대단하고 더 사소한 것으로 재고 하려는 동시대 시각 예술가의 자리를 드러낸다. 주지하다시피 장은의 작가는 영상, 설치를 하다가 2014년 이후 ‘회화’를 하고 있는 시각 예술가이다. 여러 장르, 매체, 기법을 구사하는 동시대 작가에게 회화는 유일한, 보편적인, 대문자 예술이 아님은 당연하다.

에피소드 – 모르지만 나와 닮은 당신과 나의 공존에 대한

<원> 시리즈는 장은의가 경험한 특별한 순간, 하나의 에피소드에 근거한다. 작가는 2017년 독일 레지던시에서 동독 출신의 남성 작가와 콜라보 전시를 위해 공동거주를 했다. 언어, 인종, 젠더 등등 어떤 면에서도 공통점도 없는 타인과의 공동거주이자 콜라보 작업이었지만 (당연히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쪽으로 가는 게 재능인 작가에게는 역시 그 상황도 “물 흐르듯 순조롭고 창조적인” 과정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작가는 부엌 개수대에서 자신이 먹을 포도송이를 씻고 있었고 우연히 포도 한 알이 개수대 안에 놓여 있던 동독 작가의 와인 잔 속으로 퐁당 빠지는 일이 있었다. 그 순간 작가는 “조화로우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지고, 일상적이면서도 낯섦이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 (장은의의 말하기는 ‘사이’를 위한 말이다. 세 번 인용된 그녀의 말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모호하게 중간에 겹치는 곳에 머무르는 그녀의 재능 같은 것을) 위에서 내려다 본 와인 잔 속 포도 알 하나. 큰 원 속의 작은 원. 그릇과 열매 혹은 어떤 공통점도 없는 두 존재가 원으로서의 공통점을 드러내는 순간. 물론 그것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특이한 시점이 없었으면, 그 상황을 미적 경험으로 전치시키는 작가의 태도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순간이다. 차이를 존중하고 환대하라는 동시대의 에토스는 맥락과 상황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관념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이 구체적인 일상,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체화되는지, 그것이 어떤 경험을 유도하고 어떤 경험에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알지 못한다. 배운 가치이고 체화되지 못하는 관념이고 떠도는 사실들이다.

장은의는 자신의 경험, 전달하자마자 곧 사소하고 평범해질 그 경험을 대신에 시각 언어로 번역했고 그것이 <원> 연작이다. 선진 서구에 도착한 동양의 작은 여성과 몰락과 박탈을 겪은 동독 남자라는 처지는 두 사람이 차이 속에서도 서로를 ‘인정’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차이의 공존을 번역할 이미지를 개수대에서 포착해낸다. 부시지 않은 그의 그릇으로 떨어진 나의 포도 알 하나가, 이 사소한 이어짐이 예술가의 시각적 이데아로서, 일상적 드로잉으로서, 회화적 구성으로서 (재)구성 되었고 반복·확장되었다. 2017년 개인전 <두 개의 원: 서로 다른 세계가 공존하는 어떤 방법>을 시작으로 2019년 디스위켄드룸에서 열린 전시 <A plate : 나와 다른 당신에게 건네는>을 거쳐 앞으로의 작업에서도 타자와의 공존에 대한 포스트-회화적 제안은 계속될 것이다.

언뜻 보면 일상의 한 장면을 중립적으로 포착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장면이나 상황에 대한 인공적인 구성인 이 포스트-회화, 언뜻 보면 단순한 정물화이지만 공존이란 다원주의적 이념의 주관적이면서 시각적인 번역인 이 지적 구성 앞에서 그렇다고 우리는 진지해지거나 엄숙해지지 않아도 된다. 앞서 말했듯이 밋밋하고 담백한, 시선을 잡아끌지 않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밋밋하고 담백한 진실, 생활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극적인 사건으로서가 아닌 개수대 같은 시시한 장소에서 내려다보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회화는 그런 진실을 담을 수 없음을, 드로잉으로 내려간 회화라는 장치를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슬쩍 제안하게 된다.

포스트-회화

근대적 산물로서의 회화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자신의 포스트-근대적 정당성을 혹은 시대착오적 의의를 항변하거나 고지한다. 위대한 예술의 시대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 고가의 상품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 화가의 특권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미술관에서 회화를 찾는다. 시각 예술가에게 회화는 실험의 대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고 재전유 하는 매체로서 전유 된다. 그것이 담지했던 휴머니즘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지, 그것을 여전히 반복하는 게 그것의 과거의 영광에 대한 회고적 반추는 아닌지, 동시대 예술가는 과연 근대적 예술가에게 어떻게 경의를 표하면서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예술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예술들 중의 하나로서의 회화를 어떻게 표식 해야 하는지 고심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의 역사성은 단지 위대한 예술의 환상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장은의 작가가 언급하는 회화는 여전히 회화로 보일 수도, 포스트-회화로 읽힐 수도 있다. 그녀의 태도가 모호하기 때문이고, 그런 모호성은 그녀의 작업들이 중시하는 미적 가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치 포스트-휴머니즘이 근대적 휴머니즘과의 거리를 통해서 여전히 휴머니즘을 증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밋밋하고 담백한 회화, 동시대 다원주의의 가치(이념)를 회화적 이미지, 미적 구성, 혹은 시각적 장치를 통해 전달하려는 작가의 그림을 ‘사는/소장하는’ 사람들이 일반인들, 작가의 화면에서 자신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이미지를 발견하는 사람들이라는 뒷이야기도 흥미롭다.

오늘날 예술은 여전히 미술관에서 전시됨으로써 근대적 맥락에 부착되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의 사회적 맥락이나 관객과의 관계는 알게 모르게 포스트-근대적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사회적 맥락이나 기능 혹은 관심과의 거리를 전제로 미술관의 흰 벽에 걸리기로 가정되었던 이 회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 각자의 사소하고 다양한 이야기와의 ‘관계’를 경유해서 전시 이후의 삶, 여생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회화의 보편성-환상에의 선망이 아닌, 자신의 주관적 이야기를 대입하고 싶은 시각적 단서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작가의 그림을 소장한다는 이야기가 내게 흥미롭다. (만약 누가 묻는다면 내게는 워머의 사과가 그렇다. 도대체가 조화와는 전혀 거리가 있는 이 크고 어색한 둘의 공존이 내게는 많은 이야기를 대입하게 만드는, 내게서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단서이다).

내부로 수렴하고 환원하는 방식을 놓고 고심했던 근대는 둘(나와 너/당신)보다는 하나에 대해, 내적 완전성과 자기 동일성을 위한 무대였다. 그리고 장은의의 포스트-회화는 나와 다른 너와 내가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 그러나 장은의라는 장소를 경유해서만 우리에게 도착할 메시지,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로서 써먹어도 좋은 이야기들을 위한 제안이다. 한 사람의 일회적이고 일화적인 장면이고 우리 각자가 ‘당신’ 때문에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고, 굳이 미술관을 방문하는 우리가 즐기는 예술이다.

양효실(평론)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