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발견, 생활의 발견

언제부턴가 회화가 얇아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내게 그런 이야기는 그림이 감각적이라는 설명과 그만큼 깊이가 사라졌다는 부정을 동반하는 것으로 들린다. 디지털 환경이 회화의 내면 깊숙이 파고든 결과일수도 있고, 달라진 시대를 견디고자 하는 화가들의 당연한 반응일수도 있겠다. 분명한 건 회화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다는 것이다. 회화가 곧 미술이었던 시대가 더는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근대적 원근법이 회화에 ‘깊이’를 안겨주었듯이, 지금 우리가 숨쉬는 시대가 회화에 무엇을 가져다줄지를 고민하는 듯하다. 회화에 유통 기한이 있음을 받아들이되,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늦추고자 하는 절박함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회화가 얇아졌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는 회화의 얇음은 두께와는 관계가 없다. 최근 들어 단색화가 다시 주목을 받으면서 그것을 과거의 지적 사유의 결과물로 보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상업 화랑의 마케팅이 만들어낸 착시 현상일 뿐, 단색화 속에 어떤 논리, 개념, 구조가 배어 있다는 생각을 앞세워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회화를 ‘감각’은 있되 생각은 없는 것으로 폄하하는 것 같아 조금 불편하다. 우리는 감각이라는 지평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

디지털 환경의 ‘무빙 이미지(Moving Image)’를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것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냉소적 사실주의를 구상회화로 풀어낸 것도, 구상과 추상을 혼융하는 것도, 20세기적 추상을 21세기적 ‘신추상(Neo-Abstraction)’으로 전환시키는 것도, 풍경과 그 속에서 무력한 인간을 그리는 것도, 회화라는 장르를 허물어 회화의 고유성을 회복하려는 메타적 시도도 결국 ‘감각’의 발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었다. “백(白)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얗다고 느끼는 감수성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디자이너 하라 켄야(Hara Kenya)의 말처럼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느끼는 ‘감각’에서 예술이 생겨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느끼는 오늘의 ‘얇은’ 회화는 세상을 느끼는 감각의 표면을 바라보는 지금-여기의 세계관이다. 표면의 겉을 맴도는 얇은 회화가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그 표면에 머문 채 더는 들어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세상의 존재를 느끼는 ‘존재’

장은의는 세상의 존재를 찾는 게 아니라, 그 존재를 느끼는 감각의 소중함을 믿는 작가다. 그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감수성을 찾아, 그 속에 깃든 생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미술을 실천한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감각 있는 스타일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장은의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방법은 우직한 ‘관찰’이었다. 감상자의 ‘눈’과 작가의 생각을 현실로 탈바꿈시키는 (다른) 작가의 ‘손(手)’이 미술의 자장(磁場)에서 갖는 자기-통제의 의미와 맥락을 숙고해온 작업은, 다분히 개념적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현존의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이 탈육화된(disembodied) 인상으로 다가온 까닭이기도 하다. 그건 아마도 미술이라는 길을 걷는 자신의 존재를 애써 숨겨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시대 미술이 새로운 미술이라고 선택한 미술의 개념화와 비물질화를 온전히 수용하지도, 단호히 거부하지도 않은 부자유함으로 미술 안에 거했기 때문이다. 그런 작가가 조금은 달라져 돌아왔다.

이성이 만들어내는 언어적 기호에서 감각에 대한 애정으로.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한 문학평론가의 고백을 장은의도 경청했던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 그는 감각이라는 희미한 사태를 이미지로 옮겨보려 했고 이를 세인들과 나누고자 했다. 작가가 선택한 일상의 사물과 사건은 빛바랜 사진처럼 담담하다. 특별한 풍경을 찾아내지 못해 안달이 난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평범하고 흔한 소재로 선회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섬세함을 잃지 않은 이미지는 무엇을 그리겠다는 작가의 의지조차 회화의 이면에 일부러 숨겨놓은 듯하다. 세상에는 이미 그림들이 많아서 더이상의 그림을 보태는 게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것 같다. 그래도 좋았다. 아니, 그래서 좋았다.

일상의 모든 단편들을 실재적 세계에 면하여 구성되는 2차적 사진 이미지로 채집하고, 그것을 가상현실 속에서 전자적으로 매개하는 동시대 풍경이기에 그의 평범함이 좋았다. 그곳에는 감상자의 눈도, 다른 작가의 손이 아닌, 작가 자신의 ‘감각’이 존재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실재가 가상적으로 이해되는 시뮬레이션 사회를 미술이 바꿀 수는 없더라도, 그리는 자와 보는 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의 범위를 넓혀줄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자의 그림이었다. 달라진 현실을 애써 부정하지 않되 그 속에서 그리는 자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되묻고 의심하는 그림을 보고 싶었던지라 그만큼 반가웠다. 그의 작품 앞에서 나는 동시대를 먼저 살아가는 선배 작가(안규철)의 말이 떠올랐다.

“미술가란 본래 손의 노동으로 생각을 펼쳐가는 사람, 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그 말이 덜컥 밀려왔다.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생각한다는 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손의 노동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제 작가 장은의를 이렇게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은 두 번째 삶”이라고 했다. 실제 삶으로서의 첫 번째 삶과 예술이라는 두 번째 삶 사이에 작가가 존재한다는 얘기이리라. 만약 그 사이를 채워야 한다면, 나는 ‘자유’의 편에 설 것이다. 막연하지만 실제 삶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느낌, 그것은 아마 각각의 작가에게 그만큼의 작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의 자유로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자신의 이야기, 그래서 미술은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라면 누구나 매순간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소유하고 싶은 욕구로 살아간다. 그들은 분명 우리에 비해 일상을 좀더 자세히 관찰하고 느끼고 이야기한다. 일상의 편린은 ‘개인의 역사’라는 말로 재구성되는 순간 만만찮은 무게를 지닌다. 그 솔직한 이야기에 우리는 예술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한다. 장은의의 그림은 그 일상을 이야기한다.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그래서 언제나 곁에 있을 거라고 의심치 않았던 존재가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을 남기려 한다. 본래 좋은 미술이란 세상이 생각하지 못하는 질문으로 시작해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문제를 제거하고 말겠다는 ‘현실’ 미술인들의 무모한 ‘실천’보다 우리가 지금 어떤 증상으로 앓고 있는지 묻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미술이 낫다는 걸 장은의는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그렇게 그릴 수밖에.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들이 소중할 수밖에. 그 소중함을 그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수밖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그 소박한 이유를 잊었을 때 그림은 헤매게 된다.

그래서이다. 전시 제목 ‘사소한 환상(Immaterial Fantasies)’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까닭은. 작가에 따르면 이번 그림들은 평소에 찍은 사진들을 기초로 ‘정직하게’ 따라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사진들은 어떤 작업적 완성에 대한 의도 없이, 평소에 아름답다고 생각한 순간을 ‘그냥’ 찍은 것이다. 사소한 일상의 모습이고, 사소한 생각을 담은 것이다. 그런데 그림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그 별 것 아닌 일상의 사진을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많은 생각이 겹쳐진다.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작가는 수많은 선택과 감각 사이를 헤매야 한다. 게다가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어기지 않되, 닮아서는 안 되는 지점.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나는 회화라는 매체를 선택한 자의 업보. 그 순간 사소한 일상은 다시 만나게 되고 기억은 깊어진다. 사소함이 환상이 되는 그 경계에, 바로 그림이 있다. 진부하고 사소한 일상은 믿는 행위가 바로 사소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예술이란 진부하고 사소한 일상마저도 없다고 여겨지는, 그 믿음이 깨어지는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늘 실패해야 한다. 왜냐하면 작가는 늘 현실의 ‘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자는 사소해야 한다. 별 것 아닌 것, 작은 것,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내일 무엇을 할까를 계획하는 작가보다 오늘 무엇을 그릴까를 고민하는 자에게 믿음이 가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을 판단하기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사소함을 ‘관찰’하는 자로 살아가는 자가 많아지면 좋겠다. 작가 장은의처럼 좋은 안목을 갖춘 관찰자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사실 지금 우리 미술은 너무 치장되어 있다. 너무 말이 많다. 저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미술 속에서, 지구의 ‘서쪽’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시대 미술 속에서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는 자, 내 발 밑을 내려다보고 내 곁을 성찰하는 데 좀더 겨를을 내는 자가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자가 그리는 미술, 그 미술이 전하는 어떤 ‘마음’이 전하는 목소리에 세상이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누가 그랬던가.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아픈 부분이 있다고. 장은의는 생활의 발견을 통해 그림을 발견하는 작가다.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 아픈 일이다. 나는 장은의의 그림에서 그 아픔을 보았다. 그래서 외로웠고, 그래서 편안했다. 나만 외롭지 않다는 그 안온함. 세련된 겉모습과 지적인 내면을 가꾸기 위해 애를 쓰는 다른 미술 사이에서 그런 미술을 만날 수 있음에 행복했다. 그런데 아는가 그 사소한 환상을 안겨주는 그림이 실은 더 오래 보게 하고 오래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윤동희(북노마드 대표) 2014